만해 한용운 선생 생가지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으로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중략)...(님의 침묵/한용운)
빗길의 만해 한용운 선생 생가지에 왔다. 제일 먼저 만해문학체험관에 들렀다. 누구보다도 조국을 사랑했던 선생의 모습이 체험관에 있었다.

그러나
당신은 언제든지
오실 줄만을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우리는 학교에서 만해(萬海) 한용운을 공부하여 알고 있다. 승려(僧侶)이자 시인(詩人)이었던 만해가 말했던 당신은 세속의 연인이 아닌 나라임을. 그가 살았던 공간은 식민지 백성들에게 너무 안타까웠던 곳이었다. 이토록 만해(萬海)는 식민지(植民地)하에서 신음하던 이들을 안타까워했다.

체험관에서 한용운 선생을 만났다. 만해는 선친에게 의를 배웠다. 고향에 있을 때 선친(先親)에게서 조석(朝夕)으로 좋은 말씀을 들었으니 선친은 가끔 어린 나를 불러 세우고 역사상에 빛나는 의인(義人), 걸사(傑士)의 언행을 가르쳐주며 또한 세상 형편, 국가사회의 모든 일을 알아듣도록 타일러 주었다고 쓰고 있다.
그는 항일운동으로 많은 옥고(獄苦)를 겪었다. 체험관에서 옥중(獄中) 동지(同志)를 전송하며 남긴 시가 나를 울린다.
천하에 만나기도 쉽지 않네만
옥중에서 헤어짐도 또한 기이해
옛 맹세 아직도 식지 않았거든
국화와의 기약을 저버리지 말게
만해는 독립운동으로 인한 옥중생활과 다양한 활동으로 인해 피곤한 심신을 이끌고 오세암에 들어왔다. 오세암에서 심성을 가다듬고 정열적으로 님의 침묵 대부분을 써 내려 갔다. 님의 침묵 말미(末尾)에 발문의 성격으로 쓴 ‘독자에게’란 시를 통해 그 당시 만해의 심정을 엿볼 수 있었다.
독자여 나는 시인으로 여러분의 앞에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여러분이 나의 시를 읽을 때 나를 슬퍼하고 스스로 슬퍼할 줄을 압니다. (중략)
만해는 해방을 보지 못하고 그가 살던 심우장에서 입적하였다. 그가 바라던 세상을 보지 못했음일까. 만해의 생가터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 만해 한용운 생가지는 1879년에 만해 한용운이 태어난 곳이다. 만해는 1904년 강원도 인제 내설악의 오세암으로 출가하여 백담사에서 득도하였다. 3.1 독립운동을 이끈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작성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26년에 시집 ‘님의 침묵’을 출간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서고 민족혼을 깨우려 노력하였다, 1944년에 서울 성북동의 심우장에서 66세의 일기로 입적하였고 유해는 망우리에 안장되었다. 만해는 세상을 마칠 때까지 불교를 통한 애국 청년운동과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사상을 북돋워 일으키는데 힘을 기울였다. (생가지 앞 팻말에서)
● 만해는 말년에 이르러 비로소 성북동에 집을 갖게 되었다, 마음 놓고 기거할 방 한 칸 없는 생활을 보다 못한 지인들이 마련해 준 것이었다. 그런데 이 집을 지을 때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볕이 잘 드는 남향으로 주춧돌을 놓았다. 이것을 본 그는 “그건 안되지. 남향이면 조선총독부를 바라보게 될 터이니 차라리 볕이 좀 덜 들고 여름에는 좀 덥더라도 북향으로 하는 것이 낫겠어.”라며 주춧돌을 돌려놓아 북향집이 되었다. 이리하여 북향으로 주춧돌을 놓고 집을 지으니 이 집이 심우장(尋牛莊)이었다. 손수 지은 이 택호는 소를 찾는다는 뜻이다. 이곳 심우장만은 민족의 혼을 간직하고 조국을 지켜준 마지막 보루였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