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기

몽촌토성

광교가이 2024. 2. 26. 07:21


몽촌토성은 올림픽 공원 안에 있어 상당 부분 중첩되어있다. 공원 안의 야생화 학습장을 지나 토성길을 걸었다. 길을 걷다 보니 백제집자리전시관이 보여 안에 들어섰다. 전시관의 문화해설사님이 우리가 걸어온 길이 문화재 위를 걸어왔다고 한다. 이런 죄송스러울 수가 있나 했더니 여기는 그렇다고 한다.


전시관에서 몽촌토성에 대하여 배웠다. 몽촌토성에서는 백제 한성기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많은 유물과 유적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최고 지배세력이 거주했을 궁궐터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포장도로 건물지와 움집터 독무덤 저장구덩이 토기 돌절구들이 출토되어 당시 중요한 세력이 거주했음이 분명하다고 한다.


몽촌토성은 지금은 주변 지형이 바뀐 탓에 마치 평지성처럼 보이지만 남한산에서 뻗어 내려온 낮은 곳에 쌓은 일종의 산성이라고 한다. 성벽 바깥쪽에 목책이 있으며, 토성을 감싸고 도는 해자가 있다, 성벽의 동북쪽 작은 구릉에는 목책 보루가 있어, 지나는 이의 시선을 끌었다. 목책도 사적이라고 한다.

길을 걷다 보니 아직도 유적을 발굴 중인 곳도 보였다. 몽촌토성은 1983년부터 총 6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한성백제의 왕성으로 주목받아 왔다. 언제 끝날지도 잘 알 수 없어 보였다.


은행나무 보호수를 멀리서 바라보며 계속 길을 걸었다, 몽촌토성 산책로를 지나 몽촌역사관을 지났다. 서서히 조금씩 비가 오는 듯하여 서둘러 지하철 역사 쪽으로 걸어갔다.

● 1988-89년에 발굴조사를 한 결과 몽촌토성 안에서 지상 건물터와 구덩식 집자리, 저장구덩이가 여러 개 확인되었다. 백제집자리전시관은 모두 4개의 집자리를 보존 전시하고 있는데 앞 시기에 왔든 집자리와 나중에 만든 집자리가 겹친 모습이다. 그중 3개의 집자리의 모양은 평면 육각형으로 남쪽에 출입시설이 있고 내부에는 주거지 한쪽 벽을 따라 밖으로 돌출된 형태의 화덕 시설이 있다. (전시관 앞의 팻말에서)

● 토성에서 화살촉 뼈갑옷 등 무기류가 다량 출토되어 군사적 요지로 활용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학계에서는 몽촌토성을 백제 한성기 남성(南城)으로 보고 북성(北城)인 풍납토성에 비견되는 방어적 성격이 강한 별궁으로 이해하고 있다. 몽촌토성은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구와 유물로 볼 때, 475년에 한성이 고구려에 의해 함락된 이후 일정 기간 고구려 군대가 주둔하면서 사용하였고 6세기 후반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후에는 점차 신라의 마을로 변해간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조선 시대에 촌락이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전시관 안의 설명에서)

● 서울 몽촌토성 안에서는 각종 집자리와 건물지 저장구덩이 연못이 발굴되었고, 많은 토기와 중국에서 수입한 도자기들 뼛조각으로 만든 갑옷 등이 출토되었다. 서기 475년 고구려군이 백제왕도 한성을 공격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군이 먼저 한성의 북쪽 성을 7일 밤낮으로 공격해 함락시키자 남쪽 성에 있던 백제 개로왕이 성을 빠져나와 서쪽으로 도망치다가 잡혀 죽었다고 한다. (토성 안 팻말에서)

● 몽촌토성 목책은 사적 제297호로 목책의 높이는 2m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지금의 목책은 기둥 흔적이 발견된 자리에 추정하여 복원한 것이다. 고대의 문헌에는 목책이 성곽과 더불어 중요한 방어시설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백제는 삼국 가운데 가장 활발히 목책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목책 앞 팻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