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기

박달재

광교가이 2024. 3. 4. 06:34


봄이 되었는데도 거리가 쌀쌀하다. 옷을 두껍게 입었는데도 날씨가 추워 몸을 움츠리게 된다.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로 유명한 충청북도 제천의 박달재(504m)에 왔다. 깊은 산속이어서 그런지 쌓인 눈이 많이 보였다. 박달재는 구불구불한 고개로 눈이 내리거나 도로가 얼면 위험하여 운전하기 험난했던 길이라고 한다. 오래전 이 길을 지나다녔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은 박달재 터널이 완공되어 고개를 넘는 차량은 보이지 않았다. 옛 박달길이라고 해서 과거의 향수를 느끼려는 운전자들이 관광 목적으로 다니는 고갯길이 되었다.


옛날에는 박달재를 넘으려면 걸어서 며칠이 걸렸다고 한다. 고갯길이 험하고 가파르고 박달나무가 우거져 있어 호랑이 같은 산짐승들이나 행인을 노리는 도적들이 많아 이곳을 넘는 새색시는 다시는 친정에 갈 수 없어 눈물을 흘리고 넘었다는 사연으로 울고 넘는 박달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넘는 우리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짓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울었오 소리쳤오 이가슴이 터지도록
...(중략)(울고넘는 박달재/반야월)


박달재 휴게소에는 계속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노래를 들으며 조금 걸어 박달재 노래비로 왔다. 노래를 지은 반야월의 일생도 알게 되었다. 이곳에 그의 추모관을 세우려다 제천시민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그의 친일행각이 아쉽다.

걸어서 가까운 곳의 박달재 목굴암에서 각종 목각제품을 감상하였다. 다양한 목조각과 괴목은 신기하기만 하다. 나오면서 건물 입구에 있던 글귀가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행복은 느끼는 사람의 것
건강은 지키는 사람의 것

길을 돌아 휴게소 앞으로 왔다. 앞에는 애국지사 이용태, 이용준 선생 형제 동상 및 추모비가 있다. 두 분은 제천 출신의 애국지사이다. 이용태 선생은 대종교 간부활동 및 민족운동으로 독립운동에 기여(寄與)했고 이용준 선생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여 조국 독립에 공헌하였다. 이 땅을 지키기 위하여 헌신한 분들에게 감사하며 길을 나섰다.


● 가수 반야월(半夜月, 1917-2012)은 경남 마산 출신으로 ‘사막의 애상곡’으로 데뷔하였으며 작사가로서 활동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다수의 군국가요에 이름을 남겼는데 ‘결전 태평양’, ‘일억 총진군’ 등의 작사를 맡았으며, ‘일억 총진군’, ‘조국의 아들-지원병의 노래’, ‘고원의 십오야’를 노래하였다. 해방 이후 작사가로 활동하여 수많은 인기곡을 발표하였으며, 1950년 ‘울고 넘는 박달재’를 작사하였다. (제천의병유족회, 민족문제연구소 충북지부 제천단양지회)

● 조선 시대에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박달은 해가 저물어 고개 아래의 촌가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이 집에는 금봉이라는 처녀가 살았다. 그들은 서로 눈길이 마주쳤고 사랑에 빠지게 되었으며, 박달은 더 있게 되었다. 얼마 후 박달이 과거에 급제한 후에 함께 살기를 약속하였고 한양으로 떠났다. 금봉은 날마다 서낭당에서 박달의 장원급제를 빌었으나 박달은 돌아오지 않았고 고갯길에서 박달을 부르며 숨을 거두고 말았다. 과거에 낙방하고 돌아온 박달은 금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목 놓아 울었다. 울던 박달은 금봉이 고갯마루를 향해 너울너울 춤을 추며 달려가는 모습을 보았다. 금봉의 뒤를 쫓아 뛰어 금봉을 끌어안았으나 박달은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었다. 이후에 사람들은 박달이 죽은 고개를 박달재라 부르게 되었다. (박달재의 설명에서, 위키피디아)

● 2000년대 초반에 4차선 터널이 생기면서 성각스님이 이곳에 문화를 이루기 위해 많은 고행 끝에 목각공원, 목굴암, 오백나한전을 조성하여 지금은 많은 사람이 찾는 제천의 관광명소가 되었다. (목굴암 브로셔에서)

● 이용태(1890-1964) 지사는 충주시 산척면 출신으로 만주로 건너가 1942년 대종교가 독립운동 정치단체로 지목되어 8년형을 선도 받고 복역 중 광복을 맞아 출옥하여 귀국하였고 1964년에 별세하였다. 이용준(1907-1946) 지사는 신간회에서 활동하였고 상해로 망명하여 천진 폭탄 의거(1932)에 가담하였다. 일제의 주중 공사 암살계획을 추진하던 중(1933) 발각되어 5년형을 받고 복역하였다. 해방 후 공산당의 피격으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두 분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기념비 앞 국가 보훈부 지정 현충 시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