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산
지하철 9호선 중앙보훈병원역에서 일자산에 올랐다. 일자산(一字山, 134m)은 서울특별시 강동구와 경기도 하남시 경계에 있는 산이며 그다지 높지 않아 걷기에 편하다. 산길을 걸으니 먼발치의 도시들이 손에 잡힐 듯하다. 걷다 보니 허브 식물원과 온실을 만났다. 허브천문공원이다. 공원에는 조명이 설치되어 있어 지역 주민들이 밤에도 여가를 보낼 수 있는 곳이다. 공원을 들러보고 또다시 걸어갔다. 간간이 나타나는 주택가를 지나 박두진 시인의 시비가 눈에 들어왔다. 노래로도 불리어 사람들에게 익숙한 시이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 (해/ 박두진)
길을 걸어 해맞이 공원을 지났다. 지역 주민들이 아침마다 운동 삼아 와서 아침 해를 맞이했을 해맞이 공원에서 바라본 하남 시내는 평화로운 모습이다. 해맞이 공원을 지나 둔굴로 들어섰다, 둔굴은 고려말 이집(李集) 선생이 공민왕과 신돈의 실정을 탄핵하여 신돈의 박해를 피해 은거하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은거 동안의 고난을 후세에 잊지 않기 위해서 호를 둔촌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둔촌동 동명의 유래는 이집 선생의 호인 둔촌에서 유래되었다.
다시 길을 걸으니 수많은 묘지가 나타났다. 이제는 돌보는 이가 없는지 관리가 잘 되어 있지 않아 보였다, 수많은 주검 사이로 걸어갔다, 묘지석이 있는 묘도 있고 그냥 봉분만 있는 묘도 있었다. 언젠가 우리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묘지 저쪽으로 마을이 보였다.
● 박두진(1916-1998) 시인은 경기도 안성 출생으로 1939년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에 시 ‘향현(香峴)’, ‘묘지송(墓地頌)’ 등을 발표하였다. ‘청록집’(1946), ‘오도(午禱)(1953)’, ‘거미와 성좌’ 등 다수가 있다. (위키백과)
● 둔촌(遁村) 이집(李集, 1327-1387)은 고려말의 대학자로 이색 정몽주 이숭인 등과 더불어 절개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인물 한국사, 정성희, 장선환)
● 공민왕(1352-1374)은 고려 후기의 개혁 군주였다. 고려 말에 원나라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과감한 개혁정치를 단행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왕비인 노국공주와의 애틋한 사랑과 요승으로 알려진 신돈의 등용 등 여러 가지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있다. 재위 초반에는 고려의 자주독립과 개혁정치에 노력을 기운 공민왕이었지만,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 반란과 잦은 전쟁은 공민왕의 인격을 파탄 냈으며, 노국대장공주의 죽음과 정치적 고독감을 이기지 못해 지나치게 성적인 것만 탐닉하는 왕이 되었다. 전대 왕들의 사치를 비판하며 백성의 생활을 걱정하던 그였지만, 말년에는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고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강행했다. 공민왕은 신돈이 실각한 뒤로 이상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제위(子弟衛)를 두어 나이 어린 미소년들을 뽑고는 동성애와 관음증에 빠져 지내기 일쑤였다. 자제위는 형식상 왕의 경호를 위한 귀족 자제들의 집단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들 자제위 미소년들과 기괴한 유희를 즐겼다. (인물 한국사, 정성희, 장선환)
● 신돈(辛旽, ?-1371)은 요승이라 평가받은 고려 말기 혁명가이다. 옥천사 여종의 아들로 태어나 중이 되었다, 공민왕의 신임을 얻어 백성을 위한 개혁을 펼쳤으나 권문세족들의 반격으로 권력의 정점에서 밀려나 반역자로 참살되었다, ‘고려사’에 남은 신돈의 모습은 요승 그 자체였다. 신돈이 죽은 뒤 대궐 뒤 숲속에서 꼬리가 아홉 달린 늙은 여우가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고 한다. ‘고려사’는 신돈을 반역 열전에 올리고 그의 인물됨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신돈은 사냥개를 무서워했으며 활 쏘고 사냥하는 것을 싫어했다. 또한, 호색 음탕하여 매일 검정 닭과 흰말을 잡아먹고 양기를 돋구었다. 당시 사람들이 이러한 신돈을 늙은 여우의 요정(妖精)이라고 했다.” (인물 한국사, 정성희, 장선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