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의동 거리
경복궁 담장을 지나 통의동 거리를 걸었다. 골목길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지나치는 길가의 카페나 공방에 앉아있는 이들은 각자의 행복을 누리고 있는 것 같았다. 통의동 거리는 적산가옥과 관사 등 일제강점기의 건물이 아직도 남아있는 핫 플레이스라고 한다. 길을 걸어 통의동 백송터에 왔다.


조선 21대 국왕 영조가 세자 책봉 전 거주하던 창의궁 터에 있는 통의동 백송터는 우리나라 백송 중 가장 크고 아름다워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으나 1990년 태풍으로 넘어가 고사(枯死)되어 현재 밑둥만 남아있다, 이 지역 주민들이 태풍으로 고사된 천연기념물의 의미를 담고자 이곳에 여러 그루의 백송을 식재(植栽)하여 한마음으로 가꾸어 보호하고 있다. (백송 앞 설명에서)
백송을 지키려는 주빈들의 노고가 눈물겹다. 백송터 주위를 들러보았다. 바로 앞에 있는 건물은 1층을 사람이 지날 수 있게 만들어 놓고 작은 연못도 만들어 모습이 아름답다. 백송과 주위 경관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생각이 묻어난다.


산숭해심(山崇海深), 유천희해(遊天戱海)
산은 높고 바다는 깊다. 하늘에서 노닐고 바다에서 즐긴다,
추사 김정희가 즐겨 쓰던 글귀로 서예가 유천 이동익의 글씨라고 한다. 백송 앞에 쓰여있어 옮겨보았다. 인품은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게, 기품은 하늘에서 노는 학처럼, 바다 위를 나는 기러기처럼 살라 하는 글귀 일진데 나를 돌아보면 그렇지 못해 아쉬울 뿐이다.
돌아 나오는 길, 조선총독부 관사 터가 보였다. 관사에는 주로 일인들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대부분 사라지고 몇 개 남지 않았다고 한다. 이 또한 우리의 역사로 지켜야 할 일이다.
●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추사체를 창안한 조선 후기 북학파의 실학자. 본관은 경주, 호는 추사, 완당이며 조선의 실학과 청의 학풍을 융화시켜 경학·금석학·불교학 등 다방면에 걸친 학문 체계를 수립한 문인으로 서예에도 능하여 추사체를 창안했다. 그림에서는 문인 화풍을 강조하여 조선 말기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