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범 가옥
서촌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골목은 잘 정돈되어 걷기에 좋다. 골목을 걷다가 만난 이상범 가옥. 동양화가이자 신문기자였던 청전 이상범 선생의 집에 오게 되었다.

인왕산 너머로 기우는 달빛 아래서
집에 문 앞에 있던 글귀. 선생의 작품세계를 한 마디로 표현한 느낌이 들었다. 이상범 선생은 1942년부터 1972년 작고할 때까지 이 집에서 살면서 청전 양식이라 불리는 작품세계도 완성되었다. 청전(靑田)은 그의 아호이다.

집 안을 들러보았다. 부엌 바로 위에 청전 이상범 가옥이라고 쓰인 커다란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건물의 붉은색 기둥들은 근대 도시 한옥으로 지켜야 할 아름다운 유산으로 보였다. 신발을 벗고 안방에 들어섰다. 안방은 부인의 거처인데 선생은 이 방에서 운명하였다고 한다. 선생은 옆의 청전화숙(靑田畵塾)에서 그림을 그리고 주택에서는 가족의 생활공간과 사회적 활동공간을 구분하여 자신은 대청 건넌방을 행랑채와 함께 사용하였다. 또한, 대문에 면한 방과 대청에 면한 건넌방을 각각 남, 여 손님용 응접실로 사용하였고 이웃한 화실로 직접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가 살았던 방을 사진에 담고 그의 그림도 감상하였다.
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청전의 작품 ‘초동(初冬)’이 있다. 이 그림은 전통적인 산수화 기법에서 벗어나 근현대로 나아가던 한국화의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한다. 서양 원근법의 요소가 적용되어, 전경은 진하고 사물들을 세밀하게 묘사하여 그림의 대상이 되는 사물의 개체적 사실에 주목하였다. 청전이 말했다.
“어떤 것이 우리의 것인가라는 문제는 나로 하여금 우리의 습속과 전통과 풍경을 살피게 했고 그것을 어떻게 그림에 흡수시킬 것인가를 연구하게 하였다. 내가 우리나라의 언덕과 같은 느린 경사의 산과 초가집, 초부들을 발견하고 그러한 소재에 가장 어울리는 화법으로 미점법을 발견해낸 것은 바로 이때였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이상범(李象範, 1897-1972) 선생은 한국의 새로운 남종화의 방향을 개척한 화가로 평가된다. 초기의 화풍은 안중식의 산수화와 유사했으나, 차츰 독특한 구도를 선보이는 등 독자적인 세계로 진입하였다. 고요한 향토색을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표현하며, 한국적인 산수화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사건(1936)으로 고문을 당했다. 미술 담당 기자였던 그는 직접 사진의 일장기를 물감을 이용해 흐릿하게 만들었고 청산가리 농액으로 없앤 뒤 인쇄하게 되었다. 40일간 모진 고문을 받고 풀려났다. 이후 종로구 누하동에 자리를 잡고 청전화숙의 운영에 전념하게 된다. 하지만 과거의 항일 경력을 잊고 친일 활동을 하였다. 조선남화연맹의 창립을 주도하였고, 전시를 통해 벌어들인 돈을 헌납하여 일제의 전쟁에 협력하였다. 해방 후 친일인명사전에 기록되었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