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수 가옥
걸어서 박노수 가옥에 왔다. 현재 미술관으로 쓰이는 박노수 가옥은 많은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본래 윤덕영의 딸이 살던 집으로 화가인 박노수 선생이 인수하여 개인의 노력으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서울시 문화자료라고 한다.

친일파 윤덕영과 벽수산장 이야기이다. 친일파 중 가장 재산이 많았던 사람은 윤덕영인데 옥인동의 절반 이상으로, 지금의 서촌 부지, 수성동 계곡, 배화여자고등학교, 인왕산 자락까지 모두 다 윤덕영의 집터였으며 아직도 흔적이 남아있다. 집 안에는 능금나무밭, 자연 숲, 한옥과 하천이 있는 총 2만 평의 저택으로 이완용 땅의 네 배였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백성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만들어진 곳으로 1921년에 보도된 동아일보 기사에 '조선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집'이라고 소개된 곳이 바로 이 '벽수산장'이다.
세상 사람이 아방궁이라 부르는 그 집.
세상 사람들이 아방궁보다도
아방궁을 짓는 돈이 어디서 나왔는지
그 까닭을 더 이상하게 생각한다.
바로 이 벽수산장이다. (동아일보, 1921.6.23.)
이 가옥은 1930년대 건축된 문화주택으로 서양의 입식 생활을 지향하면서 전통적인 온돌을 사용하였다. 조선 후기 관료이자 친일파인 윤덕영이 딸을 위해 지었지만, 한국화단의 거장인 박노수(朴魯壽) 화백의 40년의 삶과 작품세계가 정원과 함께 주택 곳곳에 담겨 있다, 1층의 벽돌 구조와 2층 목구조가 어우러지고 현관 옆 벽난로가 있는 응접실과 대청이 함께하며, 입식 부엌을 갖추었다. 연관의 바닥과 타일의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현관 중문 안쪽의 하얀 플라스터 벽체와 쪽마루널 역시 옛 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 4쪽 여닫이문으로 연결되는 안방과 거실의 개방적 공간 구성은 전통건축의 안방과 대청을 닮았다, 2층 남정 박노수 화백의 작업실은 원모습이 그대로 유지되어 있다, 2022년 종로구에서 인수하여 현재는 종로 구립 박노수 미술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건물 앞 설명에서)
벽수산장의 일부분이었을 박노수 가옥을 미술관으로 만들어 시민에게 내어준 박노수 화백이 고맙다. 길을 걸어 내려오며 미술관을 다시 돌아보았다.
● 박노수(朴魯壽, 1927-2013)는 한국화 1세대 화가로 간결하면서도 격조 높은 문인화를 추구했으며, 기존 수묵화에서는 보기 힘든 쪽빛을 감각적으로 채색한 산수화로 유명하다. 기존의 도제식 학습이 아닌 정규 대학 교육을 받은 1세대 한국화가 시대를 열었다. 그는 절제된 색채와 간결한 선묘로 한국화의 맥을 이으면서도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독자적 작품세계를 펼쳤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윤덕영(1874-1940)은 악행이 하도 많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를 주관하였고,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때 고종과 순종을 협박하고 체결에 가담하였으며, 합방을 강제로 체결하려 하자 그의 조카 딸인 순정효황후를 협박하여 옥새를 탈취하였다. 고종을 독살한 인물로 추정되며 일신의 영달과 부귀를 위해 황실과 백성들을 배신하고 팔아먹은 그는 1940년에 사망하면서 화려한 친일의 막을 내렸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에는 윤덕영의 자택인 벽수산장(碧樹山莊)이 있었는데 1913년부터 1917년까지 프랑스식으로 건축한 지하 1층, 지상 3층, 연건평 795평짜리 호화 저택이었다. 광복 후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사무실로 사용하였다가 1966년에 보수공사 중의 실화로 2, 3층이 전소되었고, 1973년에 도로정비사업으로 철거되었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