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하숙집터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중략)..(별헤는밤/윤동주)
길을 걸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애틋하게 바라보는 윤동주 시인이 하숙했던 집터에 왔다. 원래의 하숙집은 사라지고 빌라가 지어져 하숙했던 집터임을 알리는 표지판만 있다.

윤동주 시인은 연희전문 재학시절 기숙사에 있다가 누상동으로 와서 후배 정병욱 시인과 함께 이곳에서 하숙하였다. 정병욱 시인은 윤동주 시인을 잘 따르고 좋아하였다고 한다. 하숙집 주인은 소설가 김송이었다. 시인은 저항 문인 김송(金松)에게 많은 감화를 받았으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그 시절, 도로 사정이나 모든 것이 열악하였고 차비도 충분하지 않았을 그는 수성동 계곡과 인왕산을 걸어 학교에 다녔다. 새벽에 일어나 학교에 가고 밤늦게 하숙집에 돌아왔을 것이다. 왕복 대여섯 시간 걸렸다고 하니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전등도 많지 않고 산길을 걸어 다녔으니 아마도 수많은 시간을 별을 보며 걸었을 것이다. 그는 별을 헤며 고향과 어머니를 그렸고 시로 남겼을 것이다.
이역만리 형무소에서 죽어간 그가 안타깝기만 하다. 또한, 후배 정병주의 손에 의해 시가 남겨져 우리가 시를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 고마운 일이었다.
● 서울시 종로구 누상동 9번지인 이곳에는 민족시인 윤동주의 자취가 남아있다. 1941년 연희전문에 재학 중이었던 윤동주는 자신이 존경하는 소설가 김송이 살던 이 집에서 하숙 생활을 하였다. ‘별헤는 밤’,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등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그의 대표작들이 바로 이 시기에 쓰여졌다. 아쉽게도 현재 집의 원형이 남아있지 않지만, 청운동 윤동주 문학관에서 시인의 흔적을 만나볼 수 있다. (건물 앞 설명에서)
● 윤동주(尹東柱, 1917-1945)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며 시인이다. 북간도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고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를 졸업하였다. 연희전문학교 2학년 재학 중 소년(少年)지에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하였다. 일본에 건너가 1942년 교토 도시샤 대학에 입학하였다.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되어 100여 편의 시를 남기고 27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요절하였다. 사인이 일본의 소금물 생체실험이라는 견해가 있고 그의 사후 일본군에 의한 마루타, 생체실험설이 제기되었다. 사후에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김송(金松, 1909-1988)은 1940년 희곡 ‘농월’로 데뷔한 소설가이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정병욱(鄭炳昱, 1922-1982)은 국문학자, 민속학자 겸 수필가이다. 그는 시인 윤동주의 벗이자 후배로 연희전문 기숙사와 하숙에서 생활을 함께하고, 자필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원고를 증정받아 일제의 눈을 피해 지켜냈다. 전문학교 졸업을 앞두고 강제 징병으로 전장에 끌려가게 되자, 어머니께 소중한 원고니 꼭 지켜달라는 유언과도 같은 말을 남겨, 어머니는 마루를 뜯고 바닥에 보관하였다. 윤동주가 옥사하고, 해방된 후 정병욱은 그 원고를 찾아 윤동주의 전문학교 동기 강처중, 동생 윤일주 등과 함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였다. 한글과 민족의식을 말살하려 했던 일제의 탄압 속에서 윤동주의 시를 보존하고 윤동주라는 시인을 세상에 알린 장본인이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