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기

강화 광성보

광교가이 2024. 12. 9. 07:02


오랜만에 강화도를 여행하게 되었다. 강화도 가는 길은 교통체증으로 여행하기 쉽지 않아 자주 갈 수 없는 곳이어서 마음이 설레었다. 강화도에 와서 제일 먼저 광성보로 왔다. 역사 이래로 강화도는 수도인 한양과 왕실의 방어를 위하여 중요한 곳이어서 군사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강화도 해안 경계부대는 진(鎭)과 보(堡)가 있었으며, 광성보는 조선 시대 강화도 해안을 방어하기 위한 경계부대였다.


안해루(按海樓)라고 쓰인 광성보의 정문으로 들어왔다. 먼저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는 크지 않고 건너편 육지는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느껴졌다. 바다는 마치 강처럼 보이지만 강화도는 섬이므로 바다임이 분명하였다. 바다의 이름도 염하강이라고 한다. 바다 건너는 김포시이다. 지형상 이 지역이 바다로 돌출해 있어 좁은 여울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손돌목이라 하여 밀물일 때는 급류를 이루어 배가 건너다니기 어렵다고 한다.

광성보는 신미양요(1871)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당시 초지진과 덕진진을 거쳐 광성보에 이른 미군은 상륙하기 전에 포격으로 광성보를 초토화하였다. 어재연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군은 물러서지 않고 분전하였지만 패하였고 장군도 전사하였다. 나라를 위하여 싸웠던 어재연 장군의 대장기(大將旗)인 수자기(帥字旗)가 있어 장군의 충성심을 후세에 알리고 있다.


무명용사비로 왔다. 무명용사비는 장군을 비롯한 군사들이 용감하게 싸우다 순국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이다, 그 옆에 쌍충비(雙忠碑)가 있다. 어재연 장군과 어재순 형제의 순절비를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열세인 무기로 미 해군과 대항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기 때문이다, 근처에 있는 신미순의총이 많은 피해가 있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돌아 내려오며 광성돈대로 왔다. 돈대 안에는 신미양요 때 사용하였던 대포와 소포, 블랑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때 미군은 남북전쟁을 겪은 최강의 군대였다. 많은 사상자를 내고 전투가 끝이 났고, 이후 조선의 정부는 나라의 문을 잠그고 망국(亡國)의 길로 걸어 들어갔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 손돌이라는 지명은 이곳에 있던 손돌이라는 뱃사공의 이름에서 나왔다. 고려 때 몽고의 난을 피해 이곳에 도착한 왕이 바다를 건너고자 하였다. 왕이 탄 배가 바다를 건널 때 손돌이 배를 급류 쪽으로 몰아 위험을 느낀 왕이 손돌의 행동을 의심하여 그를 죽이려 하자 그가 죽기 전 자기가 죽은 뒤 바다에 바가지를 띄워 바가지가 가는 대로 배를 몰면 안전할 것이라 하여 손돌을 죽인 뒤 그의 말대로 했더니 배가 무사히 바다를 건너게 되었다. 이에 왕이 크게 뉘우쳐 손돌의 무덤을 만들고 크게 제사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조선의 백성들이 미국의 상선을 침몰시킨 사건을 빌미로 미국이 군함 5척과 1,200여 명의 병력으로 강화도를 침공하였는데 이를 신미양요(1871)라고 한다. 미군이 초지진을 함락하고 광성보를 공격해 오자, 어재연 등이 이끄는 조선군 수비대는 목숨을 걸고 미국 군대에 맞서 싸워 이를 물리쳤다. 신미양요 이후 흥선대원군은 서양과의 통상 수교를 거부하는 정책을 알리기 위해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어재연(魚在淵, 1823-1871) 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강화도 광성진을 수비한 명장이다. 6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광성진에서 배수진을 치고 수비하던 그는 덕진진을 함락한 미군의 총공세에 맞서 고군분투하였다. 수륙양면작전을 전개하는 미군을 맞아 야포사격을 전개하다가 육박전에 돌입하여 물러서지 않고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