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기

강화 전등사

광교가이 2024. 12. 11. 07:16


광성보에서 나와 강화 전등사에 왔다. 주차장에서 절로 오르는 길이 가파르다. 오르는 길에 강화 삼랑성(三郎城)을 지나갔다, 삼랑성은 일명 정족산성이라고도 한다. 단군이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 하고 이름을 삼랑성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걷는 길의 현판에서)


오르는 길가에 전등사 소나무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무기의 대체 연료로 소나무 송진까지 공출하여 수탈한 흔적이 지금까지도 있으니 침략의 깊은 상흔을 지금까지 볼 수 있다. 안타까운 역사의 모습이었다.


길을 걸어 전등사 경내로 들어섰다. 전등사 한가운데 커다란 느티나무가 보였다. 고려 충렬왕 때 송나라의 대장경을 간행하여 이 절에 보관하도록 하고 옥등(玉燈)을 시주한 후 전등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고찰은 광해군 때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다가 1615년에 재건하였는데 그때 풍치목(風致木)으로 심은 나무로 보이는 이 느티나무는 대웅전 뜰 앞에서 전등사를 찾는 이들의 쉼터로 조화를 이루며 자연의 운치를 더하고 있다. (느티나무 앞 현판에서)

날씨가 추워도 전등사에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사람들 사이에서 대웅전과 약사전 등 경내를 들러보았다. 대웅전 뜰 앞에서 전등사를 해설하는 해설사님은 대웅전 나부상에 대한 전설을 이야기해주었다. 이에 다시 대웅전 나부상 조각을 다시 바라보았다.


전설에 따르면 대웅보전 건립에 참여한 도편수가 불사(佛事)하던 중 마을의 주모와 깊은 사랑에 빠졌다. 불사를 마치면 주모와 혼인할 생각으로 모아둔 돈을 모두 맡겼는데, 공사가 거의 끝났을 때 찾아가니 여인이 자취를 감추었다. 공사가 끝나갈 무렵 대웅전 지붕의 처마 네 군데에 지붕을 떠받치는 벌거벗은 여인상이 만들어졌다. 도망간 여인이 참회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도편수의 불교적 사랑과 염원이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사찰 브로셔에서)

대웅전 너머 정족산을 바라보았다. 전등사를 품은 정족산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 삼랑성 안에는 전등사가 있으며 전등사에는 대웅전, 약사전, 범종 등 대한민국의 보물이 있고,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정족산 사고와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 보각이 있었다. 조선 고종 3년(1866)에 프랑스 군대가 침공한 병인양요 때 양헌수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프랑스군을 물리친 곳이다. (길가의 현판에서) 동문 쪽에는 전등사가 호국불교의 진원지임을 증명하는 양헌수 승전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