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기

김삿갓 문학관

광교가이 2025. 5. 5. 06:33


비가 내리고 있다. 매홀역사문화포럼의 행사로 새벽부터 빗길의 영월 여행에 나섰다. 그리고 도착한 김삿갓 문학관. 우산을 들고 문학관으로 들어섰다. 김삿갓 문학관에 들어오자 현관에서 좋은 글귀를 만났다.

- 당신은 참 멋진 사람입니다.


김삿갓은 양반의 신분을 버리고 방랑하는 삶을 선택한 조선 후기의 방랑 시인이다. 그는 한시(漢詩)의 전형적인 주제와 틀에서 벗어나 민중의 삶을 현실적으로 표현하고 자유로운 형식의 씨를 썼다. 김삿갓은 당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스스로 성(姓)만 말할 뿐 이름을 밝히지 않아 정체를 숨겼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삿갓을 쓰는 것을 좋아한다는 연유로 김삿갓이라 불렀다. (문학관의 글에서)

김병연은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을 일으키고자 학업에 정진하였지만 20세 무렵 과거를 포기하고 영월을 떠나 방랑을 하였다, 김삿갓의 방랑은 과거 시험에서 김익순을 비난하는 내용이 담긴 ‘가산군수 정시의 충성스러운 죽음을 우러러 논하고 하늘에 닿은 김익순의 죄를 탓하여 나무라다.’라는 주제의 시를 썼다고 한다. 그때까지 김병연은 김익순이 그의 조부라는 사실을 몰랐고 나중에 이를 알게 되어 자책(自責)하여 방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삿갓은 방랑을 시작하여 57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천하 산천을 집으로 삼고 자연 친화적인 삶을 살았다. 그의 시에는 조선 팔도를 방랑하며 만난 명승지에 대한 경탄과 자연경관을 바라보며 느낀 감정들이 꾸밈없이 담겨있다.

맘은 아직도 타향에서 고향 그리는 여우 같은데
형편은 또 울타리에 뿔 걸린 양처럼 궁박한 길.
예로부터 남쪽 고을에는 과객이 많았나니
구르는 쑥대, 뜬 부평초처럼 떠돈 게 몇 해였나?
...(중략)...(한평생을 돌아보며 지은 시)

김삿갓은 전국을 돌며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시를 남겨 놓았다.

소나무와 소나무 잣나무와 잣나무 바위와 바위를 도니
(송송백백암암회(松松栢栢岩岩廻))
물과 물 산과 산이 곳곳마다 기묘하구나
(수수산산처처기(水水山山處處奇))

집을 떠나 삼십여 년 넘게 방랑 생활을 한 김삿갓은 여러 곳에 전전하며 숙식을 해결하였다, 방랑 생활 동안 김삿갓은 환대를 받기보다는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였다. 문전박대하고 조롱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들의 야박한 인심에는 해학적으로 비꼬는 글을 지어 면박을 주었고 사람들의 친절한 배려에 감명받으면 감사한 마음을 숨기지 않고 시로 남겼다. 다음은 방랑 중 어느 집에 들러 밥을 청하자 멀건 죽 한 그릇을 주며 좋은 대접을 하지 못하여 무안해하는 가난한 주인의 마음에 감사하며 지은 시이다.

다리 네 개 소나무 소반에 죽이 한 그릇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감도는구나.
주인장께선 무안하다 말하지 마오.
청산이 물에 비치는 걸 나는야 좋아하거니...
...(죽 한 그릇(죽일기, 粥一器))

김삿갓은 봉건적 질서가 흔들리는 조선 후기의 민중의 현실을 눈으로 직접 보고 민중들의 삶에 공감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진실하고 솔직하게 시로 표현한 민중 시인이었다. 김삿갓의 시를 가슴에 담고 문학관을 나왔다. 문학관에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은  조선 시대 후기의 풍자 시인으로 유명했던 방랑  시인이다. 그는 흔히  김삿갓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한자로 ‘삿갓 립(笠)’자를 써서 김립(金笠)이라고도 한다. 그의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1811년 홍경래의 난 때 평안도의 선천의  부사로 있다가, 홍경래가 이끄는  반란군한테 전격 투항한 것을 두고 비난하는 시로써 장원한 것을 수치로 여겨, 결국 일생을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죽장(竹杖, 대나무  지팡이)을 벗 삼아 각지로 방랑하였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정시(鄭蓍, 1768-1811)는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가산군수(嘉山郡守)로 부임했다가 홍경래 군(軍)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김익순(金益淳, 1764-1812)은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방랑시인 김삿갓의 할아버지이다. 1812년  홍경래의 난  때 선천부사 김익순은 홍경래(洪景來)의 반군과의 교전에서 패하고 항복하였다. 나중에 홍경래가 관군에게 패하고 사살되자, 농민 조문형(趙文亨)에게 1000냥을 주기로 하고 반군의 장수 김창시(金昌始)의 목을 베어 오게 하였다. 약속대로 조문형이 김창시의 목을 베어 조정에 바쳤으나, 이를 어기고 돈을 주지 않았다. 이에 조문형이 고발하여 사실이 밝혀지고, 모반대역죄로 참수당하였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