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기

수원화성박물관

광교가이 2023. 8. 4. 06:46

#기행문원고
68. 수원화성박물관230714

올여름은 유난히 많은 비가 내린다. 오늘도 비가 오는 거리를 걸어 수원화성박물관에 왔다. 박물관 앞에 와서 보니 많은 선정비(善政碑)가 있다. 선정비는 백성을 어질게 다스린 벼슬아치를 표창하고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인데 실제로 이 지역을 잘 다스린 분들이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선정비를 지나 수원화성을 건설하기 위하여 채석장에서 돌을 채취해 날랐던 거중기(擧重機)와 유형거(游衡車)와 녹로가 있다. 굉장히 과학적인 모습이어서 깜짝 놀랐다. 앞에서 바라본 수원화성박물관의 모습은 수원화성의 공심돈을 모델로 만들었다고 한다. 자주 다니면서도 잘 몰랐다.


비를 피하여 현관으로 들어섰다. 1층에는 조선 시대 수원화성과 수원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모형도가 있다. 그 시절 살았던 수원의 지형을 잘 만들어 놓아 새로운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2층의 화성 축성실은 수원화성의 축성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정조가 화성 행차 시 입었던 갑옷도 있고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와 화성의 축성과정을 담은 화성성역의궤와 수원화성 축성과 관련된 유물도 보았다. 모형 전시를 통해 축성물자의 이동과 재료에 따른 축성방법을 살펴보았다. 또한, 둔전을 재현해 놓아 발전해가는 조선 후기의 수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조는 수원에 많은 행차를 하며 지나갔던 지역의 백성들을 만나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백성들과 직접 대면하여 사회문제를 인식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려 하였으며 행차를 통해 국왕의 위엄을 알리고자 하였다,

도서관에서 만나는 정조대왕은 장엄하게 빛이 나는 모습이다. 정조의 행차 중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1795년의 수원 행차였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위한 행차로 6,300명이 동원된 대규모 행차였다고 한다. 정조는 군복인 융복을 입고 수원으로 행차하였고 화성에 입성하기 전에 강력한 왕권을 상징하는 황금갑옷으로 갈아입었다고 한다. 수원화성 완공(1796)을 앞두고 왕조의 중흥과 권위를 통하여 관료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애민정신 실천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어 왕권의 위상을 세우자 하였다. 행렬 앞의 대장기(大將旗)와 용이 그려진 대형깃발이 왕의 위엄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이었다. 행차하는 그림에는 정조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깃발로서 임금이 있음을 대변하였다. 왕의 어진(御眞)은 함부로 그릴 수 없는 존엄한 것이었다.

수원화성을 건설하기 위하여 정조는 책임감을 높이기 위한 공사실명제 추진하였다. 기술적 지식이 있는 장인(匠人)을 직접 통제하는 패장(牌將)이라는 직책을 두어 공사의 질을 높였다. 오랫동안 현장에서 일하였던 석수(石手)와 목수(木手)들은 편수라는 이름으로 편제하여 조정에서 나온 감독관들을 도와 현장을 지휘하도록 하였다. 기술자들을 천시하던 풍토를 없애고 기술자들을 우대하여 열심히 일하였다. 화성의 사대문에는 공사책임자 중간 간부 기술자의 이름을 새겨 공사에 대한 책임감을 높였다. 더불어 축성공사 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는 참여한 기술자와 일꾼들의 이름까지 모두 적어 완벽한 공사실명제를 추진하였다.

화성 문화실에는 정조의 개혁정치를 가장 충실히 수행한 채제공(蔡濟恭) 관련 유물이 있으며 왕권과 군사력 강화를 위해 창설된 장용영 군사들의 무기와 무예 자료를 통해 수원화성의 위상을 느낄 수 있었다.

관람 후 1층으로 내려왔다. 잘 꾸며진 카페가 있었다. 커피를 마시며 바깥을 바라보았다. 비가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 안 그런 선정비도 많지만, 선정비는 학정의 상징이다. 2007년 충북대 교수 임용한이 경기도 안성, 죽산 역대 수령 305명 가운데 현존하는 선정비 주인공 57명을 분석해보니 8%만이 ‘수령칠사’에 의해 우수 수령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임용한, ‘조선 후기 수령 선정비의 분석’, 2007)

● 거중기는 조선 시대에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던 기계이다. 1792년 정조의 명을 받아 수원 화성을 건설할 때, 실학자 정약용이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만들었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유형거는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이 수원 화성(華城)을 축조할 때 고안해 사용한 수레이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녹로는 활차(滑車, 도르래)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데 쓰이던 기구이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공심돈(空心墩)은 화성에서 새로운 성곽의 축조 정신을 가장 상징적으로 대변하며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겨 주는 시설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수원 화성(華城)에서만 볼 수 있다. 공심돈이란 글자의 뜻대로 하면 속이 빈 계단 모양의 평탄지를 옹벽으로 받친 돈대(墩臺)이다. (문화원형백과)

●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1752-1800)는 규장각을 설치하여 학문을 발전시키고 장용영을 창설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탕평책을 추진하고 정국을 안정시켰다.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서얼을 등용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하였다. 또한, 국가 경제 활성화를 위하여 다양한 개혁정책을 추진하여 오늘날 세종과 더불어 성군으로 추앙받고 있다. 특히 수원화성 축성과 신도시 수원 건설을 통하여 오늘날 수원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홍재전서(弘齋全書)의 ‘홍재(弘齋)’는 정조의 호로, 정조가 동궁 시절부터 국왕 재위 기간 지었던 여러 시문(詩文), 윤음(綸音), 교지 및 편저 등을 모아 60권 60책으로 편집한 문집이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는 조선 정조 재위 시 총 2년 8개월간 수원화성을 축성하며 그 건설 과정 및 기타 제반 사항들을 모두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여 남긴 책이다. 축성과정에 사용된 공사법과 적들에 대한 대응방안, 공사에 사용된 각종 기자재의 상세한 모습과 사용방법, 축조 과정을 기록한 일지, 관청들의 명칭과 관원들의 이름, 정조의 윤음 및 각종 전달문, 현장에서 왕 및 관련 관청에 올렸던 각종 보고문 및 장계, 축조 과정에서 사용된 물품의 종류와 수량 등 2년 8개월 기간의 모든 내용을 상세히 수록하였다. (도서관의 설명에서)

● 둔전(屯田)은 변경(邊境)이나 군사요지에 설치해 군량에 충당한 토지를 말한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18세기에 활동한 문인으로 벼슬은 호조 참판, 병조 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재능있는 문필가였으며 문집으로 ‘반암집’이 있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