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기

운학산 현등사길

광교가이 2023. 9. 20. 19:57

#기행문원고
82. 운악산 현등사길

가평 운학산 현등사길의 한 펜션에서 우리 친구들의 모임이 있었다. 나는 저녁이 되어서야  도착하였다. 반가운 얼굴들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만남을 즐기고 있었다.


펜션은 낡았으나 가을 저녁은 운치가 있다. 해가 떨어지고 고즈넉한 펜션에 비가 내렸다. 제법 많은 양의 가을비가 지붕의 차양(遮陽)에 떨어졌다. 한적한 펜션이 빗소리로 이내 시끄러워졌다. 잠시 후, 빗소리는 잦아들고 주위가 조용해졌다.  친구들의 목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아침이 되었다. 비가 그친 아침 펜션의 모습이 아름답다. 시간을 내어 아침의 현등사길을 걸었다. 시산제 명당자리를 지났다. 산사람들이 안전산행을 위하여 제를 지내며 안전을 기도했을 것이다. 고개를 들어 운악산을 바라보니 멋지다.


길을 걸어 삼충단(三忠團)에 이르렀다. 조병세(趙秉世), 민영환(崔益鉉), 최익현(閔泳渙) 세 분의 우국지사(憂國之士)를 기리는 제단이다. 나라를 위한 마음으로 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들께 잠시 예(禮)를 취하고 바라보았다.


길가의 코스모스와 들국화가 눈에 들어왔다. 생명력이 강한 꽃들이다. 겪지 않으면 좋겠지만 살다 보면 누구나 어려운 일을 겪게 된다. 나 또한 그랬다. 죽을 만큼 어려운 고통에서 걸어 나온 사람은 다시 살게 된 삶에 대한 전환적 사고방식을 갖게 된다. 삶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나쁜 것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고 삶이 치유(治癒)되고 있었다.

● 운악산(935m)은 산꼭대기 위에 바위가 구름을 뚫을 듯 서 있다 하여 운악산이 되었다. 많은 바위와 폭포와 천년의 고찰 현등사가 있어 고요한 정취와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산이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삼충단(三忠團)은 일제의 무단 침략에 항거한 조병세, 최익현, 민영환 선생을 기리기 위해 가평의 유지들이 1910년에 만든 제단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병세, 민영환 선생은 그해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으며 최익현 선생은 의병을 조직하여 싸우다 체포되어 단식(斷食)하다 아사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단이 사라졌으나 복원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추모비를 복원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2005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고 이후 다시 제작되었다. (삼충단 앞의 글에서)

● 조병세(趙秉世, 1827-1905) 선생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권 회복과 을사오적의 처형을 주청하기 위하여 고종을 만나려 하였으나 일본군의 방해로 거절당했으며 조약의 무효와 을사오적의 처형 등을 연소(聯疏)하다가 일본군에 의해 해산당하고 표훈원(表勳院)에 연금되었고 이후 자결하였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민영환(閔泳煥, 1861-1905) 선생은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조약에 찬동한 5적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요구하며 항의하였다. 이어 죽음으로 항거하여 국민을 각성시킬 것을 결심하고 본가에서 자결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선생은 1906년 74세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켜 최후의 진충보국(盡忠報國)하였던 분으로 의병항쟁의 불씨를 점화시켰을 뿐 아니라 나라가 흥하는 것은 우리의 문화 우리의 마음을 잃지 않는 데 있으며 국권 없이는 모든 것을 잃는다는 진리를 가르쳐 일제 강점기 민족운동의 지도이념으로 계승되었다.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