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 의림지에 왔다. 의림지는 충청북도 제천시에 있는 저수지로 대한민국의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현재도 관개농업에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축조 시기는 삼한 시대에 축조되었다는 말도 있고, 나중의 삼국시대에 축조되었다는 말도 있다.

제천(堤川)이라는 지역의 지명도 둑고을을 뜻하는 제주(堤州)라는 지명을 쓰지 못하게 하면서 제천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라고 한다. 1972년에 홍수 때, 제천 시가지로의 범람을 막기 위해 일부 구간의 둑을 터트린 적이 있었으나 이듬해 복구되었다. 이때 호수 지하에서 큰 샘이 발견되기도 했다. 의림지는 충청도를 '호서'라고도 부르는데, 충청에 '호수 서쪽'을 붙일 근거가 된 것이 바로 이 의림지 일원이었다고 한다.

의림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저수지로 옛날 임금님의 수라상에만 올렸다는 순채가 자생하였고 겨울철에 잡히는 공어가 명물로 알려져 있으며 호수와 어우러진 노송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있어 놀랐다. 저수지 길을 따라 걸었다. 의림지 관광안내소를 지나 의림지 용추폭포로 왔다. 의림지 한쪽에는 인공폭포가 있고, 인공폭포 가까이에 실제 폭포도 있다. 폭포는 항상 물이 흐르지는 않고 비가 오거나, 인공펌프로 물을 끌어 올릴 때만 볼 수 있다고 한다. 폭포 위에 유리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걸으며 폭포를 볼 수 있었다. 투명 유리에서 내려 보이는 발아래가 시원함이 느껴졌다.

길을 걸어 경호루(鏡湖樓)라는 이름의 정자를 만났다. 경호루에서 다시금 호수를 바라보았다. 오랜 세월을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수의 소나무들이 아름답다. ‘백년의 휴(休)’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 나 여기에서 100여 년을 살면서 의림지 둑을 지키고 그들에게 그늘을 주었다. 이제 고사목(枯死木)이 되어서도 그들에게 쉴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려 한다. 내 몸이 썩어 없어지는 그 날까지 나를 찾는 이들에게 아름다운 휴(休)로 남고 싶다.
고사(枯死)된 소나무들이 있었다. 토양 다짐으로 인한 뿌리의 산소 및 수분 부족으로 고사되었다고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고사목도 아름다워 보였다.
영호정을 지나며 아래의 농경지도 바라보았으며 호수도 바라보았다. 의림지 한가운데 자그마한 섬이 보였다. 그 작은 섬도 신기하게도 오래된 역사가 있었다. 농업용수를 공급하였을 뿐 아니라 지역주민과 방문객들이 산책과 명상을 할 수 있는 곳이었던 의림지는 항상 우리의 옆에 있었다.

● 의림지(義林池)는 제천의 명승지로 삼한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전해온다, 충청도를 호서라고 하는 것은 이 호수의 서쪽 지방이라는 의미하고 하며 제천의 옛 이름인 내제라는 큰 제방의 의미도 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유래한다. 의림지는 신라 진흥왕 때 우륵이 쌓았다는 설이 있으며, 조선 시대에 현감인 박의림이 의림제라고 하였으며 정인지에 의해 수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대대적으로 수축하였으며, 1972년 장마에 둑이 무너진 것을 복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설로는 거북바위를 돌려놓아 부잣집이 몰락하였다는 이야기와 탁발승을 홀대하여 부잣집이 몰락하고 그 자리에 저수지가 생겨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의림지를 지나는 간판에서)
● 경호루(鏡湖樓)는 의림지 서쪽에 있으며 제천군수 김득연과 서장 김경술의 발기로 창건하여 팔작집의 단청이 되어있다. 의림지를 찾는 대표적인 휴식처로 노송 사이에 있는 정자 누각은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의림지를 지나는 간판에서)
● 영호정은 의림지 남쪽 제방 위에 있으며 조선 시대 이집경이 세운 후, 6.25 전쟁으로 파괴된 것을 그의 후손 이범우가 1954년에 고쳐 지었다. (의림지를 지나는 간판에서)
● 의림지 안에 인공섬이 있다. 섬 주변에 순채가 많이 나 순주라는 이름이 붙었다. 조선 숙종 때 제천 현감 홍종우(1661-1726)가 의림지를 보축할 때 이를 기념하기 위해 김봉지(1649-1675)가 축조하였다고 전해진다. 현재 순주는 철새들의 안전한 서식처가 되고 있다. (의림지를 지나는 간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