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길 21코스를 걷기 위하여 세화리 제주 해녀(海女) 박물관(博物館)에 왔다. 박물관이 문을 여는 시간이어서 박물관을 먼저 관람하기로 하였다. 박물관에 들어와 전시된 해녀의 살림살이가 눈에 들어왔다. 이남숙 해녀의 사는 모습은 보통의 여인들과 달랐다. 삶은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자연(自然)을 대하는 진솔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바다와 함께 삶을 엮어나가는 터전이었던 제주의 어촌마을은 식수로 사용할 수 있는 용천수의 이용이 쉬운 해안가에서 취락(聚落)이 형성되었다. 배를 쉽게 정박시킬 수 있는 포구를 중심으로 어촌이 형성되면서 만들어졌다. 해녀들의 집인 제주의 초가는 자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돌, 흙, 나무, 띠를 이용하여 집을 지었다고 한다. (박물관의 설명에서)


제주의 여성들의 삶은 다른 지역과 다르다고 한다. 육지부는 내외가 구분되어 있어 여성들이 가정 살림을 맡고 남성들은 밖에서 일하였지만, 제주의 여성들은 집안일에서부터 밭일 물질 등 경제적 활동을 하여 가정 경제를 지탱하는 몫까지 담당하였다. 강인한 제주 여성들의 모습이었다.
해녀들의 속담 중에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쓴다는 말이 있다. 이는 해녀의 물질 작업이 매우 위험하다는 뜻이다. 해녀들은 바다를 관장하는 용왕신에게 의지하였으며 수시로 바닷가의 해신당에 찾아가 제물을 준비하여 물질 작업의 안전과 풍요를 기원하였다.
태왁을 등에 지고
가족을 등에 지고
힘차게 바닷속으로 (제주 해녀)
박물관에서 해녀의 생애를 살펴보았다. 물질을 배우는 과정과 출가물질, 해녀 일에 대한 회고 등 해녀의 생애를 살펴보았다. 해녀가 물질을 하면 물때와 바람이 무척 중요하다고 한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리고, 해녀가 채취하는 해산물은 수심별로 미역, 전복, 오분자기, 조개, 소라 등이 있다고 한다. 또한, 해녀들은 어촌계별로 자원의 번식을 보호하고 소득을 높이고자 포획 채취 금지 사항을 지정하여 종별로 구분하여 산란 기간에는 채취를 금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두렁박에 의지한 바다는 평생 나의 친구이자 나의 꿈이다.
제주 해녀들은 19세기 말부터 제주를 떠나 한반도 연안 곳곳과 일본 중국 러시아 등 동북아시아 일대의 바다에서 물질하였다. 이를 출항 해녀라고 부른다, 일본 어민들의 제주 어장 침탈로 해산물 채취량이 줄어 생활이 어려워져 다른 지역으로 바깥물질을 가는 해녀들이 늘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제주의 해녀 문화는 여성이 잠수 장비도 없이 바다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물질문화가 전승되고 있으며 자연과 공존하는 지속 가능한 어업, 여성공동체를 통해 문화도 전승되고 있다고 한다. 나오는 길 현관에 제주 해녀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있었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표현하고 있다.
● 이남숙 해녀(1921-2008)는 일제강점기에 제주시 구좌읍 평대리에서 태어나 13세에 해녀에 입문하여 80세까지 물질을 한 상군 해녀였다. 23세에 김득수와 혼인했으나 제주 4·3으로 남편을 잃었다, 어린 두 딸을 데리고 물질을 하여 억척같이 생활을 꾸려 나가면서도 구룡포, 백령도, 남해 등 한판도 일대에 출가 물질을 다녔다. (박물관의 설명에서)
● '태왁'이란 해녀들이 바다에서 작업할 때 몸을 의지할 수 있게 해주는 뒤웅박으로, 바다에서 작업하는 해녀들에게는 생명줄과 같은 존재이다. (박물관의 설명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