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모임이 있어 종로3가역에 와서 친구에게 전화하였다.
“모임 장소가 정확히 어디니?”
“전태일 기념관 근처에 있는 식당이야.”

가는 길에 시간이 나서 전태일 기념관에 들렀다. 오래 머물지는 못하고 잠깐 들러보았다. 전시관에서 전태일 열사의 노동운동 과정과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생애를 돌아보았다. 그 시절보다 나아진 지금의 노동현장을 보면 전태일은 무슨 말을 할까?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기념관은 한국노동운동사에서 중요한 기점을 마련한 전태일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기 위하여 서울시가 건립한 노동복합시설이다, 전태일은 노동자가 건강하게 일하고 공부할 수 있는 사람 중심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사람이다. 전태일의 분신을 통한 항거는 노동문제에 대한 사회적 각성을 불러일으켰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어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런데 전태일이 몇 살에 분신(焚身)한 거야?”
“70년대 초반에 죽었을 텐데 그러면 중학생 나이 또래였을까?”
“그러면 확인해 보자.”
스물둘의 나이로 죽은 것이 확인되었다. 대학생 또래의 청년이었을 텐데 그의 삶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 시절보다 더 나은 세상이 되어서 다행이다.

● 전태일(全泰壹, 1948-1970)은 한국의 노동운동을 상징하는 인물로 봉제 노동자로 일하면서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노력하다가 1970년 11월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라고 외치며 분신하였다. 그의 죽음은 한국 노동운동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이소선(李小仙, 1929-2011) 여사는 '노동자들의 대모'로 일컬어진 고(故)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이다. 대구 달성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였던 16살 때 방직공장에 강제로 끌려갔다가 탈출했다. 18살에 결혼했으나 계속되는 가난에 시달렸고, 1970년 장남 전태일이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이후 노동운동가가 되었다. 세상을 떠난 아들의 뜻을 이어 청계피복노조를 결성하여 농성과 단식 등의 투쟁을 통해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해 나갔다. 청계피복노조의 성공은 다른 민주노조 결성으로 이어졌고, 군사독재정권으로부터 고초를 겪었다. 1986년에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를 설립해 초대 회장을 맡았다. 이후, 의문사 진상규명 농성과 의문사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국회 앞에서 장기 농성을 벌였다. 사회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4월혁명상’과 ‘만해대상 실천부문상’을 수상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