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매산로 시립중앙도서관을 지나 팔달산에 올랐다. 조금 오르니 언덕 위 구릉에 고인돌이 보였다. 팔달산 남쪽 일대를 두루 살필 수 있는 곳이다. 팔달산 지석묘군은 경기도기념물 125호라고 한다. 총 네 개의 고인돌은 울타리를 만들어 고인돌을 잘 보관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하부구조가 겉으로 드러나 있고 덮개돌로 추정되는 돌이 흙 속에 묻혀있다. 지석묘군은 한강 유역의 선사 문화를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고인돌 근처에 정조시대 수원화성을 축조하는데 들어가는 돌을 채취하던 채석장이 있다. 그 시절 사람과 우마차가 힘들게 날랐을 터이다. 당시 석재는 성곽에서 멀지 않은 팔달산(八達山), 숙지산, 여기산(麗妓山)에서 떠온 돌로 다듬어서 사용하였다, 일의 능률을 높이기 위하여 관청에서는 미리 정해놓은 석재를 규격에 따라 값을 매겨놓고 일꾼들이 돌을 떠오면 그만큼 값을 쳐주었는데 덕분에 석재는 일정한 규격으로 통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팔달산에서 돌을 뜬 흔적이 남아있는 유적으로 바위 군데군데에 쐐기를 박았던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정을 사용해서 돌에 구멍을 뚫은 다음 그 속에 물푸레나무나 밤나무 등을 박고 물을 부어두면 나무가 팽창하는 힘으로 무거운 돌이 갈라지며 떠오른다. 돌이 뜬다는 표현에는 이러한 공정이 담겨있다고 한다, 채석장에서 크기별로 다듬은 석재를 거중기로 들어 올려 수레에 싣고 축성현장까지 운반하였다고 한다. 축성 당시 네 개의 바퀴가 달린 동차(童車), 비탈진 곳에서도 평행을 유지하는 유형거(游衡車)라는 수레가 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근처에 수원화성이 있다. 전기가 없던 시절인데도 우리 선조는 혜안을 발휘하여 이렇게 수원화성을 축조하였다. 채석장에서 멀리 수원 시내가 보였다.
● 조선왕 정조는 아버지 장헌 세자의 무덤을 화성시에 있는 융릉으로 옮기고 수원 도읍을 이전해 읍성인 화성을 짓도록 하였다. 이때 건축 설계를 맡은 실학자 정약용이 만든 건설 기계가 바로 거중기이다. 적은 힘으로 무거운 물체를 들어 올리는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해 거중기를 만들었다. 화성 건축 과정을 기록한 책인 ‘화성성역의궤’에는 완전히 조립된 거중기의 전체 그림과 각 부분을 분해한 그림이 실려 있다. 평평한 땅에 기계를 놓고 맨 위쪽에 4개, 그리고 아래쪽에 4개의 도르래를 연결하여 아래쪽 도르래에 들어 올릴 물체를 달아매고 도르래의 양쪽을 잡아당길 수 있는 밧줄을 연결한다. 이 밧줄을 편하게 잡아당기기 위해 설치한 물레를 천천히 감아 돌리면, 도르래에 연결된 끈을 통해 물체가 위로 들어 올려진다. 성능이 뛰어나 공사에 참여한 백성들의 어려움을 덜어 주고 공사 기간을 단축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한국사 사전)

● 동차(童車)는 물건을 실을 수 있는 나무틀을 만들고 그 네 귀퉁이에 바퀴를 달았으며, 나무틀의 가로대에 끈을 묶어 끌 수 있도록 만들었다. 주로 평지에서 돌, 기와 등을 나르는 데 쓰였다. 한국에서는 수원성곽을 쌓을 때 192량의 동차를 만들어 썼다는 기록이 있으며, 중국 명(明)나라 때의 병서(兵書) 무비지(武備志)에는 이를 공격용 무기로 사용한 그림이 실려 있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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