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은 일제강점기를 통하여 전통도시 위에 식민도시(植民都市)가 건설되어 새로운 근대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일제강점기 팔달산 서남쪽에서 지금의 향교로와 매산로를 따라 수원역까지 이르는 길가에 새로운 식민도시의 일본인 집단 거주지가 건설되었다. 이러한 변화에서도 수원사람들은 식민통치에 저항하며 새로운 미래로의 삶을 만들어갔다, 신작로에 서면 수원사람들의 고됨과 저항과 희망을 볼 수 있다.

비 오는 수원 신작로 근대거리를 걸었다. 차가 다니는 큰길이 아니고 이제는 골목길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지만, 해방 이후 경기도청과 수원시청 등 관공서가 만들어지고 학교가 있어 인쇄소가 성황을 이루었던 곳이다. 서울로 통학하는 학생들은 이 길을 걸어 수원역에서 기차를 이용했을 것이다. 또한, 수원 우시장으로 팔려오는 소들로 인하여 길이 먼지로 가득하였음이 분명하다. 이제 세월이 흘러 인쇄업은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지나는 인쇄소는 문이 닫혀있고 간판만이 인쇄소였음을 알 수 있다.
길을 걷다 만나는 지명(地名) 산루리. 지금은 없어진 이름 산루리는 수원화성의 팔달문 밖으로 팔달산 서남 자락을 끼고 형성된 마을로 수원의 많은 독립운동가가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신작로를 걸으면 거리에서 수원과 나라를 지켜낸 많은 독립운동가를 간판의 설명에서 혹은 구전으로 만날 수 있다. 그분들의 독립운동 과정을 살펴보면 가슴이 뭉클하다. 우리가 이렇게 살기까지 당신들의 희생이 있었다.
길가의 사진에서 민족대표 48인 중 하나인 김세환 선생을 만났다. 눈빛이 형형(炯炯)하다. 수원시청 올림픽공원에 동상으로 보았던 임면수 선생과 기생으로 독립운동을 이끈 김향화 선생, 스무살의 나이에 돌아가신 이선경 열사가 있다. 이 밖에 박선태, 김장성, 이병억, 조득렬, 차계영 선생들도 있어 옷깃을 여미게 한다.
국가로부터 공식적인 서훈을 받지 못한 산루리 출신 독립운동가도 다수 있다고 한다. 생몰 연대가 확인되지 않거나 독립을 위한 활동을 했어도 공적을 밝힐 자료가 충분치 않거나 이를 적극적으로 진행할 후손이 없는 경우가 그렇다. 묻혀 있는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기 위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대표적으로 서훈을 받지 못한 김노적, 이현경, 이용성 선생들이 있어 마음이 아쉽다.
● 김세환(1889-1945, 독립장) 선생은 수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중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다. 남수동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유학해 신학문을 배우고 수원에서 교직 생활을 하며 학생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다.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으로 독립운동 조직 활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재판을 받으면서도 기개를 잃지 않고 당당하게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했다고 한다.
● 임면수(1874-1930, 애국장) 선생은 수원지역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며 수원지역 대표적인 근대학교인 삼일학교를 설립하는데 기여하였다. 1910년 국권이 침탈되자 신민회에 가입했으며,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기지 건설과 신흥학교 설립과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일본 경찰의 모진 고문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평생을 고생하다 끝내 독립을 보지 못하고 병사하였다.
● 김향화(1897-미상, 대통령표창) 선생은 기생의 신분으로 1919년 수원예기조합원 30여 명이 건강 검사를 받으러 가던 도중 일제가 화성행궁을 헐어 활용한 자혜의원과 일제경찰서 앞에서 수원 기생들의 만세운동을 주도하며 의기를 떨쳤다.
● 이선경(1902-1921, 애국장) 열사는 산루리에서 나고 자라 1920년 서울 통학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비밀결사 ‘구국민단’에서 활동하며 임시정부의 간호부가 되어 독립운동을 돕는다고 맹세하였다. 독립자금을 가지고 서울에서 상해로 출발하기 직전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다 석방됐으나 집으로 돌아온 9일 만에 19세의 나이에 순국하였다.
● 박선태(1901~1938, 애족장) 선생은 산루리 출신으로 구국민단을 조직해 활동을 주도하였고 일제 경찰에 붙잡혀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에도 수원청년회 등에서 사회활동과 민족운동을 이끌었다.
● 김장성(1913-1932, 애족장) 의사는 산루리 출신으로 18세였던 1930년 화성학원 운동회에 많은 사람이 모일 것을 예상하고 격문을 만들어 북수리와 수원 읍내에 붙여 식민지 현실의 불평등을 알렸다. 이 활동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형 집행정지로 풀려난 뒤 고문의 여독으로 순국하였다.
● 이병억(1879-1973, 애족장) 선생은 산루리가 고향으로 하와이에 이민을 떠나 독립운동을 하였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면서 문맹 퇴치 운동과 자치 활동을 전개하다 미국 본토로 이주하였다. 이후 나성한인교민단을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집해 송금하는 등 외교 활동을 하였다.
● 조득렬(1910-1961, 애국장) 선생은 산루리 사람으로 인쇄소에서 직공으로 일하며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다가 조선 총독 우가키를 처단하기 위해 폭탄을 제조하여 암살계획을 꾸몄으나 체포되었고 해방되어 풀려났다.
● 차계영(1913-1946, 애족장) 선생은 산루리에서 태어나 조선총독부의 급사로 취직해 사회과학 연구를 목적으로 독서회 활동 중 체포되었고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경성제국대학 반제동맹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 김노적(1895-1963) 선생은 산루리에서 태어나 수원상업강습소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다. 1919년 방화수류정에서의 횃불시위를 주도 후 체포되어 심한 고문과 구타를 당해 왼쪽 손을 쓰지 못하는 불구가 되었다. 수원지역 사회운동에 관여하여 신간회 수원지회 창립과 운영에도 힘을 보탰다. 1969년 독립운동의 공로를 표창했지만, 자료가 부족하여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 인정은 받지 못하고 있다.
● 이현경(1899~미상) 선생은 이선경의 언니로 성공회가 세운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교원으로 생활하다가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1921년 3·1운동 2주기에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유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펼치다 검거되었다. 일본에서 한국 여성의 계급적, 인습적 구속 및 민족적 압박의 철폐를 주장하는 삼월회 활동을 했다. 귀국 후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 이용성(1906-1974) 선생은 산루리 독립운동가 이현경과 이선경의 동생으로 막내이다. 수원체육회와 수원청년동맹에서 활동하였으며, 김세환, 박선태 등과 함께 수원의 사회단체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해방 이후 수원시 의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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