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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나주목사내아


금성관에서 나와 나주목사내아(羅州牧使內衙)로 왔다. 나주목사내아는 금학헌(琴鶴軒)이라고도 하며 조선 시대 나주목사(羅州牧使)가 기거하던 살림집이었다. 성안에 있던 관아건물 중에서 객사 금성관과 함께 원형의 모습을 간직한 소중한 우리의 유산이다.


내아에 들어와 왼쪽에는 작은 방들이 있다. 방마다 이름이 있는데 인(仁), 의(義), 예(藝), 지(智)실 이라고 한다. 그 시절 관리들이 거주했던 공간으로 보인다. 앞에 보이는 건물 오른쪽에 나주목사 독송 유석증(俞昔曾)의 방이 있다. 청렴하고 바른 정치로 유일하게 두 번씩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푼 목민관이었다고 한다. 왼쪽은 나주목사 학봉 김성일(金誠一)의 방이다. 김성일 목사는 송사를 현명하게 처리하여 어리석은 백성도 그의 판결을 들으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현명한 선인들이 있어 지금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돌아 나오는 오른쪽에 커다란 나무가 있다. 팻말이 있어 살펴보았다. 벼락 맞은 팽나무라고 한다. 글을 읽어보니 고민을 털어놓으면 해결해 준다고 하여 나도 고민을 털어놓았다. 하긴 산다는 것 자체가 질곡(桎梏)이 아닌가. 인간사(人間事)가 그렇다.
금학헌은 계절별로 바라보는 운치가 있다고 한다. 흰 눈이 내리는 한겨울에 와도 좋겠다. 금학헌을 뒤로하고 근처의 나주향교로 길을 나섰다.


● 내아가 처음 세워진 때는 알 수 없으나 안채 상량문에 1825년(순조25) 7월 1일에 주춧돌을 놓고 7월 20일 상량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군수관사로 사용하면서 원형이 변형되었으나 최근에 충실하게 복원하였다. 목사내아에는 주변에 객사가 함께 있어 조선시대 관아건축양식의 원형을 이해할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한다.(내아앞 팻말에서)

● 유석증(兪昔曾, 1570-1623)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619년 나주목사가 되어 선정을 펼쳐 고을 백성들이 나라에 임기를 연장해 줄 것을 청하여 1622년까지 연임되었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1590년 통신부사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와서, 황윤길과는 반대로 일본이 군사를 일으킬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임란이 발생하자, 이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당했으나, 복귀하여 전쟁을 독려하다 병으로 사망하였다. (네이버고전문학사전)

● 금학헌에는 오백년 넘는 세월을 지켜주는 벼락 맞은 팽나무가 있다. 어느 날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고 천둥 번개가 내리치던 밤 팽나무는 벼락을 맞고 두 쪽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금학헌 팽나무는 뿌리 깊은 나무의 강한 생명력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나 여전히 내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벼락을 맞은 나무는 사람들에게 예상치 못한 큰 행운을 가져다주는 신령스러운 기운이 있어서 인생이 잘 풀리지 않을 때 팽나무 앞에서 고민을 털어놓으면 진심으로 경청해 준다고 한다. (벼락 맞은 팽나무 앞의 설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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