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근대역사문화거리를 걷다가 지역해설사 선생님이 골목을 바라보며 이곳에 양키시장이 있었다고 설명하였다. 이제는 골목 자체를 양키시장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지금은 주택가 골목이 되어 시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적막하다.

양키시장은 한국전쟁 이후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물자들을 거래하는 시장이었다. 상인들과의 충돌을 피하려 기존 시장 상권 밖에 있던 골목에 새로운 시장이 생긴 것이다. 보화당이 있는 골목이 양키시장이었다. 과거에 활발했던 시장의 모습은 없지만, 역사 속의 장소로 들어서니 새롭게 보인다.
우리나라의 한국전쟁은 시기의 단기성과 전쟁의 협소함을 고려하면 다른 전쟁들보다 심한 인구의 재배치를 가져왔다. 이런 상황은 한국사회의 전통적인 구조를 바꾸어 놓았다. 양키시장은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 진주한 미군의 군수품이 한국의 시장에 풀리며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고 한다. 미군 부대에서 유출되는 것으로 추측되는 물건들이 미군 부대 주변으로 전국에 생겨났다.
미군과 관계없는 지역에 양키시장이 생겼다, 인화동 양키시장 상인들은 대전과 부산 등지에서 물건을 떼다가 팔았다. 지역해설사에 따르면 주로 한국전쟁 피란민과 상이군경이 양키시장에서 장사를 했다고 한다. 이들은 시장 내에서 군 의류를 주로 판매하였다. 과거 양키시장 때문에 구 시장에 염색공장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양키시장은 1970년대를 정점으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인화동 양키시장의 상인들은 시장의 쇠락에 따라 다른 지역으로 흩어졌고 지금은 흔적이 많지 않다. 과거의 모습을 간직하면서 여러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손님들이 가게를 찾으며 머뭇거리는 듯하다. 나만의 느낌일까. 옛날 그대로의 공간과 변화하는 공간이 함께 보였다.
이제는 양키시장 골목은 북적이던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시장의 흔적은 찾을 수 없지만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여 내려오고 있다.
● 원래 양키는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방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남북전쟁 당시에는 남부인이 북군 병사에 대한 모멸적 칭호로 썼으며, 널리 퍼져 미국인 일반을 가리키는 속칭이 되었다.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