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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장릉


청령포에서 나와 장릉에 왔다. 장릉은 조선의 6대왕 단종(재위 1452-1455)의 능으로 세계문화 유산이며 사적 제196호이다. 단종은 유배 4개월 만에 세조가 내린 사약을 받고 17세의 일기로 승하하였다. 1457년(세조3)에 노산군(魯山君)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었다. 그러자, 영월의 호장(戶長)인 엄흥도(嚴興道)가 단종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현재의 자리에 매장(埋葬)하였다. 이후 1516년(중종 11)에 묘를 찾아 봉분을 만들었고, 1580년(선조 13)에 석물을 세운 후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1698년(숙종 24) 단종으로 왕의 신분이 회복되어 능의 이름을 장릉이라 하였다.


입구의 단종 역사관을 지나 재실(齋室)을 들러보았다. 재실은 능 제사의 전반적인 준비를 하는 곳이다. 이를 나와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묘를 만든 엄흥도의 정려각(旌閭閣)도 보았다. 조금 더 걸어가니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종친, 충신, 환관, 궁녀, 노비 등 268명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藏版屋)과 이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배식단(配食壇)을 볼 수 있었다.

이를 지나 정자각(丁字閣)까지 왔다. 정자각은 제향을 올릴 때 왕의 신주를 모신 곳이다, 능 제향을 올리는 정(丁)자 모양으로 만든 집이어서 정자각이라는 이름이 되었다. 이곳에서 단종임금을 향한 예(禮)를 올렸다. 높은 언덕 위에 있는 단종(端宗)의 릉(陵)이 눈에 들어왔다.

높은 곳의 장릉(張陵)은 경사가 심해 직접 올라갈 수는 없었다. 장판옥 옆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어 힘을 내어 올랐다, 아마도 영월의 비장 엄홍도는 그 시절 남몰래 시신을 지고 오르느라 힘들었을 것이다. 능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강원도에 있는 능이지만 이제는 잘 꾸며놓아 단종께서는 안심하고 잠들어 계실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려오는 길에 단종 역사관에 들어왔다. 역사관에서 굴곡진 삶 속에서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단종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단종의 유배길은 지금도 재현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역사관을 나와 장릉 입구에는 노산군의 묘를 찾아 제사를 올린 영월군수 박충원(朴忠元)의 뜻을 기린 낙촌비각(駱村碑閣)이 있어 바라보았다.


● 엄흥도(嚴興道, ?~?)는 조선 전기의 문신, 충신이다. 강원도 영월(寧越) 호장(戶長)으로 있을 때, 세조의 명을 받은 금부도사에 의해 사사된  단종의 시신을 매장하였다.  사람들은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단종의 시신을 돌보지 않았다. 이에 엄흥도는 관을 비롯한 장례 기구 일체를 혼자서 마련하여 정중하게 장사를 치른 후, 벼슬을 내놓고 아들을 데리고 숨어 살았다. 현종 때 송시열의 건의로 그의 자손이 등용되었고, 영조 때 그의 충성심을 기념하는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공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박충원(朴忠元, 1507-1581)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41년(중종36)에 영월군수(寧越郡守)로 나갔다. 당시 3명의 군수가 연이어 죽어서 민심이 흉흉했는데, 박충원이 제문을 지어 단종(端宗)의 묘에 제사를 지낸 후 사람을 시켜 지키니, 5년 동안 재직하면서 탈이 없었다고 한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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