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원고
43. 사성암(四聖庵)
구례 오산(鰲山) 사성암에 왔다. 사성암에 오르는 길은 쉽지 않다. 주차장에서 사성암이 있는 오산을 바라보면 그다지 높아 보이지는 않지만 길이 가파르다. 주차장에서 사성암까지 셔틀버스가 있어 이를 이용하여 올랐다. 갓길에 주차된 승용차들로 인하여 그것도 중간에서 내려 걸어갔다.
사성암[四聖庵]은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암자이지만 산 정상에 멋스럽게 우뚝 서 있다. 연기(鷰起) 존자(尊者)라는 분이 세운 것으로 전해지며 연기(鷰起) 존자(尊者)는 승려였다는 사실 외에는 잘 알려져 있지않아 아쉽다. 바위를 뚫고 나온 듯한 약사전(藥師殿)과 바위 위에 살짝 얹어 놓은 듯 단아한 '대웅전(大雄殿)'은 산과 어우러져 아름답기만 하다. 대웅전 옆에서 경치를 바라보니 섬진강이 돌아 흐르고 구례읍과 지리산 노고단이 한눈에 들어왔다.
기록에 의하면 4명의 고승, 즉 원효대사, 의상대사, 도선국사, 진각국사가 수도한 곳이어서 사성암(四聖庵)이라고 한다. 암자 뒤편으로 돌아서니 우뚝 솟은 절벽이 풍월대, 망풍대, 신선대라 하며 절경이 아름답다. 마애여래입상이 약사전 건물 내 암벽에 새겨져 있으며 원효대사가 손톱으로 새겼다는 전설이 있다. 정상에서 넓은 들판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구례 전경과 굽이치며 흐르는 섬진강과 넓은 평야와 그 너머 웅장하게 솟은 지리산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내려오는 길에 바람이 불어왔다. 콧등이 시원해졌다. 흘렸던 땀이 쑥 들어갔다.
● 오산(鰲山, 531m)은 전라남도 구례군 문척면 죽마리에 있는 산이다. 지리산을 마주 보는 자라 모양의 산으로 야트막하고 능선이 부드러워 가족 등반에 적당하다. 산행은 죽연마을에서 시작해 산길을 돌면 섬진강 물이 내려 보이고 정상에 서면 승려 연기가 세웠다는 사성암을 중심으로 풍월대, 망풍대, 배석대, 낙조대, 신선대 등 비경이 펼쳐진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원효대사(元曉大師, 671-686)는 신라 시대의 승려로 신라의 불교를 집대성하고 불교의 대중화에 힘쓴 인물이다. 648년(진덕여왕 2년)에 황룡사로 출가해 승려가 되었다. 동료인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던 도중 밤중에 해골 물을 마신 뒤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와 분황사에서 불교를 설파했다. 무열왕의 딸인 요석 공주와 혼인해 아들 설총을 낳았으며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네이버 지식백과)
●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는 신라의 귀족으로 태어나 출가하여 황복사(皇福寺)에서 사문(沙門)이 되었다. 원효(元曉)와 함께 당나라에 구법(求法)의 길을 떠났다가 난을 당해 이루지 못하고, 나중에 문무왕(文武王) 원년(661)에 당나라로 갔다. 그는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서 지엄(智儼, 602-668)의 문하에서 교학을 연구하여 학명을 떨쳤다. 스승의 사후에 강학(講學)을 지도하다가 문무왕 11년(671)에 귀국하였다. 그때 의상은 당군(唐軍)이 신라를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알려서 국가의 위기를 구했다고 한다. 신라의 지배이념으로서 당의 불교를 도입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 신라말의 승려이며 15세에 출가하여 화엄사(華嚴寺)에서 스님이 되었다. 846년에 곡성 동리산(桐裏山)의 혜철(惠徹)을 찾아가서 무설설(無說說) 무법법(無法法)의 법문을 듣고 이치를 깨달았다. 850년에는 천도사(穿道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운봉산(雲峯山)에 굴을 파고 수도하였으며, 태백산에 움막을 치고 살았다. 전라남도 광양 백계산 옥룡사(玉龍寺)에 자리를 잡고 후학들을 지도하였고 언제나 많은 제자가 모여들었다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진각국사(眞覺國師, 1178-1234)는 어려서 홀어머니 밑에서 공부하여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태학(太學)에 들어갔다. 이후에 조계산(曹溪山)에 들어가 보조 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밑의 승려가 되었다. 오산(驚山)에 있을 때 반석(盤石) 위에 앉아 도를 닦는데 새벽이면 시를 읊는 소리가 십 리까지 들려 마을 사람들이 시간을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리산(智異山) 금대암(金臺庵)에 있을 때 적설(積雪) 속에서도 움직임이 없이 구도(求道)에 몰두하였다. 보조 국사가 죽은 후 왕명에 의해 수선사(修禪寺)에 돌아가 보조 국사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