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 아래의 수성동 계곡에 왔다. 수성동 계곡은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가 되는 아름다운 풍광을 가지고 있다. 이전에는 옥인시범아파트가 있던 자리로 그냥 시멘트로 덮어 아파트를 지어 지하의 유물을 유지할 수 있었다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인왕산에서 발원하는 청계천의 지류인 옥류동천이 흐르는 계곡인 ‘수성동(水聲洞)’이란 이름은 맑고 경쾌한 물소리(水聲)가 인상적이라서 붙은 것으로, 여기서 ‘동(洞)’은 행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계곡’이란 뜻이다.

계곡으로 오르는 진경산수화길 코스는 한국 고유의 화풍을 만든 겸재 정선(1676-1759)이 살았던 터를 돌아보며 그림에 얽힌 역사를 알아가는 서울시 테마 산책길이다. 계곡을 걸으며 정선의 그림을 생각하여 보았다.
이 계곡은 조선 시대 선비들이 피서 장소로 많이 찾았던 곳으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세종의 3남 안평대군의 집인 비해당(匪懈堂)이 이곳에 있었다고 하며, 아마 이곳에서 그 시절의 풍류를 즐겼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그 시절의 중인(中人)들도 많이 찾는 곳으로 중인층이 주도한 문학운동의 산실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수성동 계곡의 아름다움을 담은 화가 겸재 정선의 그림인 ‘수성동’에서 북악산과 인왕산 일대의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다. 돌다리인 기린교(麒麟橋)를 비롯하여 나무 한 그루까지 상세하게 묘사했으며,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는 모습도 그림에 담았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계곡도 한때 제 모습을 잃었던 적이 있었다. 전쟁 이후 서울의 인구가 폭증하면서 무허가 판잣집이 생겨났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특별시에서는 1960년대 말부터 판잣집을 헐고 시민아파트를 여러 곳 지었는데 그중 하나가 옥인시범아파트였다. 이때 기린교도 훼손되었다. 시에서는 옛 모습을 최대한 재현하기 위하여 겸재 정선의 그림 ‘수성동’을 공사에 참고했다고 한다.
수성동 계곡이 복원되어 고마운 일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면서 수성동 계곡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하늘은 맑았다.
● 수성동 계곡은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에 수성동 그림으로 등장할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하지만 1971년 계곡 좌우에 옥인시범아파트 9개 동이 들어서면서 수려한 경관을 잃고 말았다, 다행히 40년이 지난 2012년 난개발의 상징인 옥인 시범아파트를 철거하고 이곳을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하면서 수성동 계곡 본래의 아름다움을 되찾게 되었다. (계곡 앞 설명에서)
● 겸재 정선(1676-1750)은 이병연과 평생 우정을 나누었으며 노년에 이병연의 쾌유를 빌며 그린 그림이 바로 인왕제색도이다. 한국 고유의 진경산수화 화풍을 창시했고 뛰어난 진경산수화가로서 명성을 날렸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우리 강산, 우리 것도 충분히 그 이상으로 아름답다.’라는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세종의 셋째아들인 안평대군(1418-1453)은 정치적 야심을 가진 형인 수양대군에게 맞서 어린 조카 단종을 위해 목숨까지 걸며 신의를 지킨 왕자였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한 그는 이곳 수성동 계곡에 비해당(匪懈堂)이라는 별장을 짓고 살며 시와 그림을 즐겼다. ‘게으름 없이’라는 뜻의 비해(匪懈)는 시경(詩經)에 나오는 숙야비해(夙夜匪懈) 이사일인(以事一人)에서 가져온 말로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게으름 없이 한 사람을 섬기라는 의미이다. (계곡 앞 설명에서)
● 정선의 ‘수성동’은 시내와 암석의 경치가 빼어났던 인왕산 기슭 수성동 계곡 골짜기를 그린 그림이다. 수성동 계곡에는 안평대군(1418-1453)이 살던 비해당(匪懈堂) 터와 기린교로 추정되는 다리가 있다. (계곡 앞 설명에서) 기린아(麒麟兒)는 재주나 지혜가 아주 뛰어나 장래가 촉망되는 아이를 뜻하는데 기린교는 그 시절 지혜가 뛰어난 이들이 모여 풍류를 읊어 그런 이름이 되지 않았을까 추정하고 있다. (해설사의 설명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