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걸어 창덕궁(昌德宮)으로 왔다. 창덕궁 근처에서 식사(食事)하고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으로 들어섰다. 궁을 들어서자 만난 해설사의 설명을 귀를 기울이며 창덕궁을 걸었다.
창덕궁은 서울의 5대 궁궐 중 유일하게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곳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은 궁궐이 훼손되었고, 창덕궁만 잘 보존되어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1405년 태종은 정궁인 경복궁 동쪽 향교동에 궁궐 하나를 새로 세우고 창덕궁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리고 역대 왕들은 창덕궁에서 주로 정무를 보아왔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화재와 재건을 반복하면서 지금의 고궁 모습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극적인 역사가 있는 곳이라고 하니 영욕(榮辱)을 함께 한 곳이기도 하다.
길을 걸어 바로 만난 인정전(仁政殿). 인정전은 궁궐에서 으뜸이 되는 건물이었다고 한다. 궁궐의 권위를 나타내는 동시에 의식을 치르는 공간이었으므로, 외관이 주는 상징성에 초점이 맞추어 크고 높고 화려하게 지었다고 한다. 내부에는 임금의 자리인 어좌(御座)가 있고, 그 뒤로는 임금이 다스리는 삼라만상을 상징하는 병풍인 일월오봉도가 있다고 해설사가 설명하였다. 인정전과 임금의 자리를 사진에 담았다.
인정전 옆의 임금의 일상적인 업무 공간이었다고 하는 선정전(宣政殿)으로 왔다. 임금은 여기서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고 학문을 토론하며, 신하나 유생, 종친을 불러 시험을 치르기도 하였으며, 중국과 일본의 사신을 만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 옆의 임금의 거처인 희정당 (熙政堂)으로 왔다. 희정당은 선정전보다 편안한 업무 공간이었다고 하니 주로 거처하였던 곳이었을 것이다.
왕비의 생활 공간이자 임금과 왕비의 침전이었던 대조전(大造殿)으로 왔다. 그 시절 왕실의 대통을 잇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왕실의 대통을 이을 왕자를 생산하기 위하여 좋은 날을 골라 임금과 왕비가 동침하는 장소였다고 하니 자못 궁금하기도 하였다.
한때는 임금의 편전으로 쓰이기도 하였으며 조선 말기에는 내의원으로도 사용되기도 했었다는 성정각을 보고 낙선재로 왔다. 낙선재(樂善齋)의 건물들은 소박하다. 영친왕 비 이방자 여사도 이곳에서 살다 죽었다고 하니 조선 왕조의 영욕과 마주한 곳이었다.
조선 왕조의 멸망을 지켜보았을 창덕궁이었다. 그래도 창덕궁의 풍경이 아름답기만 하다. 창경궁과 연결된 함양문을 통하여 창경궁으로 건너갔다.
●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란 달과 해, 앞의 다섯 산을 그린 그림이란 뜻으로 주로 병풍으로 그려져 조선 시대 어좌(御座)의 뒤 편에 놓여있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이방자(李方子, 1901-1989) 여사는 일본 제국의 구 황족으로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영친왕 이은과 약혼하였고 1920년에 도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5.16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초청으로 1963년에 가족과 함께 귀국하여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창덕궁 낙선재에 기거하였다. 이후, 국가의 생활비 보조로 생계를 유지하는 어려운 생활 여건 속에서도 사회봉사에 정열을 쏟아 한국 장애인들의 어머니로 존경받았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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