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합천에 있는 해인사에 왔다. 새벽부터 준비하여 온 먼 길이다. 버스에서 내리려 하니 약한 빗줄기가 있다. 버스 기사님께 우산을 부탁하니 흔쾌히 빌려주어 고마웠다.

해인사로 들어가는 길에 소원나무가 있다. 소원나무에서 소망을 빌어보고 봉황문을 들어섰다. 봉황문은 해인총림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문으로 불법을 수호하고 악을 물리치는 사천왕을 모시고 있다고 한다. 봉황문을 지나 해탈문을 지나갔다. 이 문을 통과하면 깨달음의 세계인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선다고 한다. 계단이 33개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불교에서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 정상의 33개 하늘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큰 마당 앞에 보이는 건물인 구광루(九光樓)에서 잠시 예를 갖추고 마당을 바라보니 사람들이 마당을 돌고 있다, 해인도(海印圖)라고 한다. 미로와 같은 길을 마음에 체득하면서 기도하며 따라가면 깨달음에 도달한다고 한다. 나도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며 돌았다. 결국은 출발점에 되돌아오게 되는데 우리가 사는 세계가 부처님의 세계임을 의미한다고 한다. 해인도를 돌고 범종각(凡種閣)에서 북을 두드리는 스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스님의 손끝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눈을 돌리니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라는 구절이 내 눈에 들어왔다. 세상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고정불변의 실체는 없으며 세상의 모든 존재는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확실하게 체득하는 지혜라고 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언젠가 먼지처럼 사라질 터이다. 고개를 드니 가야산의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맨 위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 장경판전에 도착하였다. 장경판전은 국보 52호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건물 내부의 온도와 습도의 조절을 자연적으로 할 수 있도록 설계하여 대장경판을 보유한 건물이다, 두 개의 건물인 법보전과 수다라장(修多羅藏)에서는 건물 앞면과 뒷면에 크기가 다른 창살을 통하여 들어온 바람이 건물 내부 전체에 퍼지게 하여 빠져나가도록 설계되었으며 내부 바닥에는 황토와 횟가루와 숯과 소금으로 다져져 있고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잘 보관하여 후세에 물려주어야 할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유산이다. 관람하기 위한 발길도 조심스러웠다. 돌아서 내려오는 길도 조심스럽다. 내려오는 길에 고사목(枯死木)도 보았다. 천년을 지켜온 해인사의 역사를 말해주는 고사목을 바라보며 국난 극복을 위하여 희생한 선조(先祖)들에게 감사하였다.

● 소원나무는 가야산 산신이 깃든 곳으로 예부터 널리 알려져 있다. 신라말 최치원이 지은 순응화상찬(順應和尙讚)에 보면 순응 이정과 화상이 당나라에 유학 가서 지공 대사의 제자로부터 가야산에 절을 지으라는 첨언을 듣고 귀국하여 가야산을 답사할 때 가야산 산신령이 점지해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곳에 소원을 적고 국사단(局司壇)에서 간절히 기도하면 소망하시는 일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문화재 앞 간판에서)
● 해인도는 의상대사(625-702)가 당나라 유학 시절 화엄 사상을 요약한 부처의 공덕과 교리를 담은 글귀를 만(卍)자를 발전시킨 도안에 써넣은 것이다. 도안 중심에서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理想)으로 시작하여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로 끝나기까지 210자의 게송을 미로와 같이 54번 꺽어 도는 동안 그 내용을 마음에 체득하여 따라가면 깨달음에 도달한다고 한다. (문화재 앞 간판에서)
● 팔만대장경판은 부처님께서 진리의 세계에 대해 말씀하신 법과 주석을 포함한 일체의 총서이다, 세계에서 가장 포괄적이고 한역 경전 중 가장 오래된 원판 본이라고 한다. 해인사를 법보종찰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 대장경판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적광전의 가파른 계단에 팔만대장경이라는 현판을 단 문 뒤에 있는 네 개의 건물이 있다. 장경판전은 건물이 있는 위치와 건물 배치와 좌향 건물 구조와 창호처리 판가 구조 경판 배열로 측면에서 통풍이 잘되고 일조량도 적당하게 하여 목판을 보존하는데 최적의 조건인 항온, 항습 상태를 유지하게 되어있다. 해인사에는 조선 후기에 일곱 차례 불이 났으나 신기하게도 장경판에는 불길이 미치지 않았다. (문화재 앞 간판에서)
● 고사목(枯死木)은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에 순응과 이정 두 스님의 기도로 왕후의 난치병이 완치되자 은덕에 감사하여 스님들이 수행하던 자리에 해인사를 창건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를 기념하여 식수한 나무라고 전해진다. 해인사와 더불어 성장하여 오다 1945년 고사하고 둥치만 남아 해인사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문화재 앞 간판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