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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초량동 차이나타운


부산역 건너 초량동 차이나타운에 왔다. 우리나라에 몇 개 남지 않은 차이나타운으로 생각된다. 차이나타운 안에는 많은 중국 음식점과 상점이 있어 이를 찾는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길을 걸어 화교학교를 지났다. 화교학교 담벼락에 유비, 관우, 장비가 만나서 도원결의(桃園結義)를 하는 삼국지 이야기가 있어 이를 보았다.

- 비록 성은 다르오나 이미 의를 맺어 형제가 되었으니 한 해 한 달 한 시에 태어나지 못했어도 한 해 한달 한 날에 죽기를 바라오니 의리를 저버리고 은혜를 잊은 자가 있다면 하늘과 사람이 함께 죽이소서.


길을 걷다 초량 근대역사 갤러리에 들어섰다. 이곳에서 초량동과 차이나타운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초량 바다는 백사청송(白沙靑松)의 바닷가였으며 고분과 무덤들이 있던 곳이었다, 중국 사람들의 점포를 겸한 주택이 형성되어 청관거리라 불리기 시작했다. 일본의 왜관 거리에 빗대어 ‘시나마찌’라고 불리기 시작하여 초량 길목에 터를 잡았다.

초량동(草梁洞) 일대에 청나라 영사관과 청국 조계지가 설치되었다. 화교들은 점포를 겸한 주택을 가지고 주로 비단, 포목, 거울, 꽃신 등 중국에서 수입한 상품으로 장사를 하였다.

일본은 거류지 확장과 대륙진출의 기반을 확보하기 위하여 영선산을 차경하여 초량 앞바다를 메웠다. 시역(市域)의 확대에 따라 항만시설 축조, 교통망의 형성, 상하수도 시설의 건설 등 다양한 시가지와 사업을 진행하였다. 일본은 부산을 대륙침략에 필요한 기반 시설을 갖춘 근대도시를 만들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남쪽으로 피난 행렬이 줄을 이었고 종착지는 부산이었다, 전시 상황에 기존 인구의 2배에 가까운 인구가 부산으로 몰려들었으며 피난민들은 살아남기 위해 산비탈을 중심으로 얼기설기 엮은 판잣집을 지었다.

1968년 초량에서 수정동 산복도로를 준공하였으며, 1969년 부산 역사를 신축하였다, 1970년대 전국적으로 취로사업을 실시하였으며, 1977년 초량천 복개 사업을 추진하였다.


초량의 근대역사는 안타깝기만 하다. 초량동 차이나타운을 들러보고, KTX를 타기 위하여 부산역사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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